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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시 #34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아픈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 눈 사람 여관, 이병률
- 1:00 | 오늘 한시
- ·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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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 눈 사람 여관, 이병률
흑백영화 속 주인공은 왜 자꾸 도시를 헤매는 걸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볏짚이 탄다 잉걸불이 인다 불씨는 자기를 새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면 새라고 믿고 날아가, 연기를 꿰어 노래를 만들었다 찻집이 모여 있는 골목을 지나면 공방이 나왔다 손으로 뜬 수세미와 골무를 보고 있었다 옷걸이 모양대로 빨래가 말라 있었다 부들부들했다 멀미가 났다 빚어서 만든 찻잔과 식기들 주인이 웃으며 바라봤다 다음 주에 전시회가 있으니 꼭 오라고 풀려버리고 난 후에도 스웨터의 모양을 기억하는 털실처럼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이 도시에서 약속을 하고 오후라고 말했다 비라고 말했다 수요일이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사람들은 창 너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둠과 더 짙은 어둠은 빠르게 지나갔다 붓끝을 털거나 손끝으로 밀어서 그린 듯..
너와 걸을 땐 땅이 오선지였고 우리 사이의 거리가 쉼표였고 지나가는 바람이 장단이었지 한 박자 쉬고 내뱉는 것이 선율이었고 난 그 안에 영영 갇히고 싶은 음표였지 - 너라는 악보, 백가희
내가 당신의 인생을 기록하자면 딱 한 문장이야 내 사랑의 패망을 기록한 역사 잘 자,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역사 속에서 당신을 사랑해 - 우리의 우리, 백가희
너를 조준해서 쏜 빛이 아니었음에도 멀리서도 네가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온 세상이 빛을 물들었다 한낮에 오래 머물렀고 깊은 밤에 깊게 적셨다 생애 처음으로 맛본 환희 사랑이 멋대로 번졌다 - 낯선 환희, 백가희
[책 속 한 문장] 밖에서는 비가 자꾸 내린다 시시하고 즐거운 바다 - 채널링 영화 밖에서도 사람은 죽지만 거기에는 자막이 없다 - 다정과 다감 창밖으로는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번갈아 지나갔다 - 노랑은 새로운 검정이다 쓸쓸한 나무에는 쓸쓸한 열매가 맺히나요 - 머리와 어깨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 그러자 저녁이 검게 물들고 - 은유 밖으로 나가니 검은 모래가 하염없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바다였다 - 유사 자신이 녹는다는 것을 알아 버린 눈이 전력을 다해 서서히 녹아내릴 때, 유리는 생각을 했다 다 녹고도 남아 있는 눈의 흰빛을 받으며 생각을 했다 - 무정 뜨거운 백사장에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들이 어떤 식으로 지난밤의 기쁨과 슬픔을 그려 내고 있는지 - 너의 아침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그..
쌀을 씻다가 창 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무화과 숲, 황인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부는 바람이 예뻐 그 눈부심에 웃던 네가 아니었니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 너에게, 서혜진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최영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빈집, 기형도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혹 시간이 맞거든 연차를 내고 시골 성당에 가서 커다란 나무 밑에 앉는 거야. 촛불도 켜고 명란파스타를 먹고 헤어지는 거지. 그날 이후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돌진하는 건 재미없는 게임이야. 잘 생각해. 너는 중독되면 안 돼.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가끔 기도는 할게.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나보다 그대가 덜 불운하기를, 그대 기록 속에 내가 없기를. 그러니까 다시는 가슴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