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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시 #34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아픈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 눈 사람 여관, 이병률
- 1:00 | 오늘 한시
- ·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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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는 일 서러울 것도 없지 폭풍이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그대도 그러한 것 뿐 꿈을 꾸고 깨어나는 일 그리울 것도 없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내가 있었던 건 그대의 탓도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갈 수도 있었던 먼 나라 우리가 붙잡을 수도 있었던 기적 달콤하고 쓰디 쓴 허상 불빛처럼 흐르다 지친 눈물 우리를 삼켰다 급히 뱉어버린 열정 위에 나는 수천 번 그대의 이름을 쓰고 지운다 지우고 또 쓴다 - 황경신
너를 보내고 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찻잔은 아직도 따스했으나 슬픔과 절망의 입자는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리석었던 삶의 편린들이여, 언제나 나는 뒤늦게 사랑을 느꼈고 언제나 나는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그대가 걸어갔던 길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툭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눈물이었다. 한 줄기 눈물이었다. 가슴은 차가운데 눈물은 왜 이리 뜨거운가. 찻잔은 식은지 이미 오래였지만 내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내 슬픔, 내 그리움은 이제부터 데워지리라. 그대는 가고, 나는 갈 수 없는 그 길을 나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할까. 안개가 피어올랐다. 기어이 그대를 따라가고야 말 내 슬픈 영혼의 입자들이. - 너를 보내고, 이정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오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안으며 나지막히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이외수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환상이고 슬퍼도 울 수 없으면 고통이며 만남이 없는 그리움은 외로움일뿐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아쉬운 아픔이 되고 행동이 없는 생각은 허무한 망상이 된다 숨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살았다 하며 불지 않는 바람을 어찌 바람이라 하겠는가 사랑이 숨을 쉬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살아있는 날엔 사랑을 하자 마음껏 울고 또 웃자 - 살아있는 날엔, 정유찬
아픈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 눈 사람 여관, 이병률
흑백영화 속 주인공은 왜 자꾸 도시를 헤매는 걸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볏짚이 탄다 잉걸불이 인다 불씨는 자기를 새라고 불러주는 사람을 만나면 새라고 믿고 날아가, 연기를 꿰어 노래를 만들었다 찻집이 모여 있는 골목을 지나면 공방이 나왔다 손으로 뜬 수세미와 골무를 보고 있었다 옷걸이 모양대로 빨래가 말라 있었다 부들부들했다 멀미가 났다 빚어서 만든 찻잔과 식기들 주인이 웃으며 바라봤다 다음 주에 전시회가 있으니 꼭 오라고 풀려버리고 난 후에도 스웨터의 모양을 기억하는 털실처럼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이 도시에서 약속을 하고 오후라고 말했다 비라고 말했다 수요일이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사람들은 창 너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둠과 더 짙은 어둠은 빠르게 지나갔다 붓끝을 털거나 손끝으로 밀어서 그린 듯..
너와 걸을 땐 땅이 오선지였고 우리 사이의 거리가 쉼표였고 지나가는 바람이 장단이었지 한 박자 쉬고 내뱉는 것이 선율이었고 난 그 안에 영영 갇히고 싶은 음표였지 - 너라는 악보, 백가희
내가 당신의 인생을 기록하자면 딱 한 문장이야 내 사랑의 패망을 기록한 역사 잘 자,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역사 속에서 당신을 사랑해 - 우리의 우리, 백가희
너를 조준해서 쏜 빛이 아니었음에도 멀리서도 네가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온 세상이 빛을 물들었다 한낮에 오래 머물렀고 깊은 밤에 깊게 적셨다 생애 처음으로 맛본 환희 사랑이 멋대로 번졌다 - 낯선 환희, 백가희
쌀을 씻다가 창 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무화과 숲, 황인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부는 바람이 예뻐 그 눈부심에 웃던 네가 아니었니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 너에게, 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