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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시 #43 편지의 윗줄은 비워놓았어요
편지의 윗줄은 비워놓았어요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내가 당신에게 미처 하지 못한 그 말을 상상할 수 있도록 - 영혼의 기억, 장 자크 로니에
- 1:00 | 오늘 한시
- ·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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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다 졌고 꽃도 저물었고 하루가 죽었고 마음의 지평선 위로 별이 총총 눈을 떴고 달은 튕겨 오르고 너는 불쑥 솟고 내 어둠에 네가 불을 켰고 너와 나의 빈틈 사이로 한숨이 날아들고 너는 잦아들고 너의 귓속말이 바람으로 불어오고 나는 흔들리고 눈썹 아래로는 작은 바다가 생기고 그냥 울어버리고 그대로 미칠 것 같은데 나 어떡하냐고 불꽃처럼 확 없어져 버리고 싶다고 - 질식, 서덕준 -
오늘 아침 나는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타는 태양이 보였어요 눈꺼풀을 덮는 것만으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세계가 있었던 거예요 - 하루의 인생, 김현영
편지의 윗줄은 비워놓았어요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내가 당신에게 미처 하지 못한 그 말을 상상할 수 있도록 - 영혼의 기억, 장 자크 로니에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 그해 봄에, 박준
어머니 전 혼자예요 오늘도 혼자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공중을 떠도는 비눗방울처럼 무섭고 고독해요 나는 곧 터져버려 우주 곳곳에 흩어지겠지요 아무도 제 소멸을 슬퍼하지 않아요 나의 우주에 겨울이 오고 있어요 나는 우주의 먼지로 사라져 다시 어느 별의 일부가 될 거예요 새로운 나의 우주는 아름다울까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누구에게든 알려주고 싶어요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도 아름다움은 있을까요? -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함성호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수선화에게, 정호승
그대가 젖어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 감겨 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 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 지난 그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이 나라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 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 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 - 내가 나비라는 생각, 허연